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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학파를 만들고 사람들을 가르치며 생물학에 대해 연구했다. 식물과 동물의 생활을 연구하면서 영혼과 육체의 관계도 함께 생각했다. 그의 나이 42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초청으로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기 위해 펠라로 갔다.

    필리포스 2세 (마케도니아의 제18대 왕 BC 359~336 재위)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가 대제국을 만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필리포스 2세는 그에게 아들을 훌륭한 군사지도자로 키워달라고 부탁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를 철학 공부를 통해 용기 있는 큰 인물로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 BC 336~323재위)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마케도니아 군사력을 인도까지 진출시켰다. 그리하여 왕국들로 이루어진 헬레니즘 세계의 토대를 쌓음으로써 거대한 대제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별로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리스인의 우수함에 대한 믿음을 갖고 미개인을 정복하고 그들과는 피를 섞지 말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과 외국인의 결혼을 허용하고 자신도 페르시아 귀족 가문의 아내를 맞이했다.
    특히, 정치적인 면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스승의 가르침에 감사했고, 그를 위해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파괴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 스타게이라를 다시 세워줬다. 마케도니아 궁정에서 3년을 보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게이라로 되돌아갔다. BC335 년까지 그는 자기의 철학 학파와 계속 교류하며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거의 50세에 아테네로 갔다, 아테네에는 여전히 아카데메이아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변한 거라면 스페우시포스가 죽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생물학을 함께 연구했던 칼케돈의 크세노크라테스가 아카데메이아를 이어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와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안티파트로스의 지원으로 리케이온을 창립했다, 리케이온은 BC335년에 세워진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원으로 소크라테스가 사색하며 산책했다고 전해지는 수림, 즉 아폴로 신전 부근의 리케이온 숲 속에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곳에서 자신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주로 학교 안의 지붕 덮인 산책로였던 페리파토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 학파는 이후 '페리파토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리케이온의 가르침은 소요학(Peripatetics)이라고 불렸다. 그리스어로 peri는 '둘레'와 pateind은 '걷다'라는 뜻이 합해진 말이다.

    그의 수업은 산책로에서 행해지는 자유로운 토론 이외에 강론으로 이루어졌는데, 오전에는 소수의 제자들을 상대로 깊은 탐구를 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강론했고, 오후에는 다수의 청중을 상대로 대중적인 문제에 대해 강론했다.
    또한 그는 최초의 거대한 도서관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곳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직접 쓴 수백 권의 원고들과 지도, 수많은 동식물의 표본들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 많은 자료들을 자신의 수업에서 능률을 높이기 위해 적절히 이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2년 동안 과학과 철학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학생들에게 수업을 했다. 그리고 많은 학자의 연구를 통합하여 탐구함으로써 리케이온은 점차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BC323년에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고, 아테네에서는 마케도니아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까지도 마케도니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테네를 섭정한 마케도니아의 장군인 안티파트로스와도 친했고 또한 마케도니아로부터 재정적으로 많은 지원을 받았다.
    마침내 마케도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난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을 모독한 죄목을 씌워 고소했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곳을 떠나 어머니의 영지인 에우보이아 섬의 칼키스로 갔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도시가 숭배하는 신들을 무시하고 새로운 종교를 끌어들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오랫동안 앓아왔던 위장병으로 죽었다.
    그가 남긴 유언장에서 자신의 행복했던 가정생활에 대해 이야기했고, 자식과 노예에 대해 깊이 배려한 글도 적혀있었다. 특히, 자신의 노예들을 팔지 말 것과 몇몇의 노예들은 자유인으로 해방 시키라는 내용을 적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자신의 글이나 말에서 보수적인 면을 보이긴 했지만,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을 가졌으며 인간적인 배려심도 깊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로 연구한 것들은 대단히 많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동물학, 심리학, 정치학, 윤리학, 논리학, 형이상학, 역사, 문예이론, 수사학 등 손에 꼽기 힘들 만큼 다양하다.
    비록 그가 연구한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줄 만큼의 업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서양에서는 17세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라고 할 정도로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철학분야에서는 현대의 철학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의 될 정도로 인정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리케이온에서 형성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와 추종자들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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