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광주와 전라남도 일원에서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의 실천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중항쟁을 국가 차원에서 기념하는 날입니다. 5·18 민주화 운동이 발생한 다음해 1981년 5월 18일 피해자 집단, 학생, 재야운동 세력이 망월 묘역에서 추모행사를 한 것이 발단되었다.

     

     

    국가는 이 추모행사가 재발하지 못하도록 탄압을 했으나, 5월 계승 운동의 일환으로 꾸준히 실행하여 1997년 5월 법정 기념일로 제정되었습니다. 올해로 43주년이 된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배경과 과정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등장한 군사정권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사망으로 붕괴하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집권하자, 신군부 세력의 집권을 막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 5월 초~5월 16일

    광주에서는 5월 초부터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이 시국 성토대회를 연일 개최하고 학생들은 5월 14일부터 광주 도심으로 진출하여 시민들과 대규모 가두 정치집회 개최했는데 '민족민주화성회'로 불린 이 집회와 시위는 5월 16일까지 계속 진행했습니다. 5월 16일 전남대에서 다시 모이기로 약속하고 해산합니다. 

    ●1980년 5월 14일 ~5월 17일 오후 7시 

    시위가 확산되자 신군부는 5월 14일부터 공수부대를 투입 계획을 세우고 17일 오후 7시에 공수부대 투입 명령을 내립니다.

    ●1980년 5월 17일 밤 11시 40분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발표

    신군부는 5월 17일 밤 11시 40분 '비상계엄이 18일 자정을 기해 전국으로 확대되었었음'을 발표하고 전국에서 대학생과 재야인사를 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자정

    광주에서 5월 18일 자정이 다 된 무렵부터 십수 명이 광주 505보안대로 연행되고 제7공수여단은 전남대와 조선대에 계엄군으로 배치해 학교에 있던 학생 112명을 연행하고 언론사와 방송국 및 광주 시내 주요 기관에 제31사단 군인을 투입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5월 16일에 있었던 집회를 해산하면서 18일 오전 전남대로 모이기로 약속한 학생들이 정문으로 집결하고, 해산을 종용하는 과정에서 첫 충돌이 발생했고, 학생들이 계엄군의 진압을 피해 도심으로 가 시민들에게 계엄 확대와 계엄군이 자행한 만행을 알렸습니다. 제7공수여단에 추가로 파병된 제11공수여단은 시위대뿐만 아니라 일반시민에게도 진압봉을 휘둘렀고, 무차별 연행을 합니다. 시민과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계엄군에 맞서고, 도심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제3공수여단이 추가투입되면서 계엄군은 계속 늘어났고 발포까지 이루어져 사상자가 급증했습니다. 시위대는 계엄군의 만행을 널리 알리고, 무력에 맞서기 위해 전남지역으로 진출하여 무기를 획득하고 이 과정에서 5·18민주화운동은 광주뿐만 아니라 전남 일원으로 확대 됩니다. 

     

     

    ●1980년 5월 18일 ~5월 26일

    19일 새벽부터 도심 곳곳에서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고,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발포했습니다. 20일 계엄군은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를 차단하고 광주시민을 고립시켰습니다. 계엄군의 사격은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을 가했고 시민들은 스스로 무기를 획득하고 '시민군'으로 활약하고 계엄군을 후퇴시켰지만 이것은 계엄군의 전략적인 후퇴였습니다. 시내에서 퇴각한 계엄군이 광주를 봉쇄하고 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를 모두 차단하고 매복하여 시민들에게 사격을 가했습니다. 

    계엄군을 몰아냈다고 생각한 시민군은 5월 21일 전남도청을 사수하고 26일까지 7일동안 시민공동체가 형성되어 '5·18 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 수습대 책위원회'를 결성해, 계엄군과 협상 활동, 시내의 자치활동을 했습니다. 

    이 기간에 시민군이 광주 치안과 행정 업무를 담당했고, 시민들은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현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27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충정작전을 개시하여 특공대가 투입되고 전남도청을 다시 점령합니다. 

    광주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많은 시민이 도청에 남아 자리를 지켰고, 1시간 남짓 교전을 했고 많은 시민군이 사망했습니다. 이 날 전남도청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0일간의 항쟁 동안 생명을 잃은 시민들은 망월동 국립 5·18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2001년 12월 18일을 기준으로 확인된 피해자는 사망 218명, 행방불명 363명, 상이자 5,088명, 기타 1,520명으로 총 7,200며명.  5·18 민주화운동은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 회복, 보상, 기념사업을 쟁점으로 '5월 운동'을 통해 계속 이어 왔습니다. 

    '5월 운동' 활동으로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1990년 8월 6일)되었고,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보상 및 기념사업이 이루어졌고, 또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1995년 12월 19일)되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다수의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청산 작업에서 발생한 오류와 미흡한 점들을 바로잡기 위한 진상규명과 처벌을 요구하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1994년부터 <5·18민주화운동 자료실>을 설치하고 <5·18자료 수집위원회>를 구성하여 5·18기록물과 유품 등을 수집하기 시작해서 2010년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를 구성하여 등재추진을 본격화하고 2011년 5월 28일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음을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보고했습니다. 

    5·18민주화 운동은 불의한 국가 권력이 국민의 존엄성을 유린하고 권리를 짓밟을 때, 그것이 얼마나 비극적이며 반 인권적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임에 의의가 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이 민주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냉전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를 이루도록 영향을 끼쳤습니다.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을 따라 필리핀, 타이, 중국, 베트남 등 여러 곳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공식 기념곡 '임을 위한 행진곡'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1980년 5월 27일 최후항쟁 과정에서 전남도청에서 최후를 맞이함 )과 노동운동 야학 활동을 하다 1978년 운명한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창작의 계기가 되어 황석영, 김종률, 전용호, 오정묵 등이 모여 오월 항쟁을 추모하고 윤상원, 박기순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창작노래극을 만들자고 황석영이 제안하여 '묏비나리'(백기완 1980년 작)를 개작하여 노랫말을 만들고 김종률이 곡을 붙여 1982년 '임을 위한 행진곡'이 완성되었습니다. 

    오월의 추모곡이자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대표곡이고, 일반 국민들이 대중적으로 부르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제 68회 현충일 추도식 6월은 국가보훈의 달

     

    제 68회 현충일 추도식 6월은 국가보훈의 달

    현충일(顯忠日)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殉國先烈)과 전몰(戰歿)한 장병들의 충렬을 기리고 얼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정된 대한민국의 중요한 기념일이자 법정공휴일입니다. 매년 6월 6일

    blog.shinnyhyonae300.com

    플라톤의 국가론

     

    플라톤의 국가론

    올바름의 의미 - 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는 가난한 시민& 플라톤은 귀족정치가 집안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최고 권력자들의 친구

    blog.shinnyhyonae300.com